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의 여진 정벌 (문단 편집) === 고려의 대규모 사민 정책 === [[척준경]], 오연총 등 여러 장수들과 고려군의 활약으로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9성을 짓고 일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윤관]]은 1108년 4월 9일 지휘부와 [[별무반]]과 함께 개경으로 귀환한다. >윤관(尹瓘)이 포로 346명, 말 96필, 소 3백여 두를 바쳤다. 윤관이 또 의주(宜州)·통태(通泰)·평융(平戎)의 세 성을 쌓고 남계(南界)의 백성들을 새로 수축한 9성으로 이주시켰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권 7, 예종 3년 3월}}} 이때 고려에서는 무려 7만 5천호가 넘는 주민들을 사민정책에 동원한다. 그러나 사민 정책이 다 그렇듯 당시 고려군 지휘부에서도 반발이 있었는데, 당시의 주요 지휘관 중 한 명인 김한충 열전에 의하면 당시 윤관은 각 부대에 9성 지역의 내성의 재목과 기와를 거두어 9성을 축조하고 이 지역에 남쪽 백성들을 이주시키는 사민 정책 계획을 들고 나왔다. 당시 9성 지역은 민간인이 많이 거주하지 않아서 부대가 주둔할 만한 요새는 있어도 마을 전체를 보호할 만한 외성이 없었기 때문에 윤관은 사민 정책과 함께 마을을 보호할 만한 외성을 먼저 축조하려고 내성을 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외성이라는 시설의 특성상 마을 전체를 넓게 둘러야 하다 보니 건설 시간이 많이 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김한충은 이 계획에 대해 "만약 외성 다 쌓기도 전에 무슨 일이 터지면, 내성이 없으니 백성들을 어떻게 지키려고 저러시나? 아무리 원수의 명령이지만 이건 따를 수 없다"라고 거세게 반발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한충이 반발하면서 나타낸 우려는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 > 윤관(尹瓘)이 여진을 정벌할 때 김한충은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 힘껏 싸워 전공을 세웠다.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가 되었을 때 윤관 등이 모든 부대에 명령을 내려 내성(內城)의 목재와 기와를 거둬서 9성을 쌓고 남쪽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성민의 수를 채우도록 하였다. 그러자 김한충은, “'''만약 외성(外城)이 아직 완공되지 않은 채로 갑자기 위급한 일이 생기면, 안에는 완전한 성이 없으니 백성들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원수께서 명령했지만 나는 감히 따르지 못하겠다'''.” 고 굳이 반대했는데,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과연 그 말처럼 되었다]]. > >{{{#!wiki style="text-align: right" 《고려사》 열전, 김한충}}}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